자유민주주의로 위장한 파시스트 전체주의



자유민주주의로 위장한 파시스트 전체주의 / 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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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 역사학자


■ 권양 성고문 사건의 진범


1986년 7월 16일, 인천지검 특수부장 김수장 검사는 이른바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권(인숙) 양의 성모욕 주장은 운동권 세력이 상습적으로 벌이고 있는 의식화 투쟁의 일환이며, 이번 사건은 폭행 사실을 성모욕 행위로 날조 왜곡함으로써 자신의 구명과 아울러 수사기관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반체제 투쟁을 사회 일반으로 확산, 공권력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빚어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같은 날, 이 사건 관련 <공안당국 분석자료>가 각 언론사에 배포되었다. “좌경 의식화된 핵심 문제 학생들은 그들 스스로의 의식화 과정과 조직 활동, 투쟁 과정에서 상호 연대의식 고취, 일체감 조장 및 조직 이탈 방지 등을 위해서 ‘성(性)’을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의식화된 문제 남녀 학생 간에 ‘성’을 공유함으로써 사회의 규범과 인간의 윤리 파괴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들 좌경 의식화 세력은 ‘성’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의식도 내던져버림으로써 투쟁과 혁명을 위해서는 어떤 가치도 희생시킬 수 있다는 노선을 걷고 있는 것이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대한변협, 여성단체 등은 이 발표에 즉각 항의 성명을 냈으나, 이듬해 초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잔인한 고문을 받다 숨진 뒤에도 진실은 바로 규명되지 않았다. 87년 민주화운동 1년 여 뒤인 1988년 7월, 법원은 가해자 문귀동에게 징역 5년형을 선고함으로써 당시 ‘공안당국’의 발표가 거짓이었다고 판정했다. 하지만 사실을 날조하고 피해자를 ‘패륜범’으로 몰았던 ‘공안당국 관계자들’중 처벌이나 징계를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 1명 잡으려 1백명 희생시킨 이들


진짜 패륜범인 고문 가해자들과 사실 날조자들에게 ‘애국자’라는 완장을 채워주고 독립과 민주화, 인권과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거꾸로 ‘패륜범’ 낙인을 찍는 ‘공안당국’의 관행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고질병’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제강점기 경찰들은 독립운동가들뿐 아니라 그들에게 협조했을 가능성이 있는 보통사람들까지 잡아들여 구타, 전기고문, 물고문뿐 아니라 손톱 밑에 대침 박기, 성기에 불침 놓기 등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온갖 종류의 ‘패륜적’ 고문을 함부로 자행했다. 식민지 검찰은 그렇게 이끌어낸 허위자백을 ‘증거’로 삼아 고문 피해자들을 거리낌없이 기소했다. 해방 이후에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경찰과 검찰의 ‘경력과 ’전문성‘을 높이 샀기 때문에 이런 ‘관행’은 계속되었다. 대상만 ‘불령선인(不逞鮮人)’에서 ‘반국가세력’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극심한 이념 대립과 분단상황, 전쟁을 겪으면서 ‘반국가세력’에게 폭력을 행사할 권리는 일부 민간인에게까지 할양되었다.


제주에서 고문당하고 학살당한 수많은 양민들, 전향서를 썼음에도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학살당한 수많은 국민보도연맹원들, 이승만이 한강 다리를 폭파하고 먼저 도주한 탓에 서울에 남았다가 서울 수복 후 ‘부역자’로 지목되어 고문당하고 살해당한 서울 시민들, 전쟁 중 공산군에게 협력했다는 혐의를 쓰고 집단학살당한 사람들, 이들 중 진짜 ‘반국가세력’은 얼마나 되었을까?


1910년 6월 22일자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 ‘무고한 양민’을 겁박하고 살해하는 자들을 ‘토왜(土倭)’라고 지칭했다. 이승만 정권 때에는 서북청년단과 정치깡패들이 무고한 사람을 ‘공산주의자’나 ‘반국가세력’으로 몰아 ‘탈재겁간(奪財劫奸)’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열 명의 죄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벌해서는 안 된다.” 18세기 영국의 판사 윌리엄 블랙스톤의 이 말은 근대 법 집행의 대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식민지 체제하, 그리고 냉전과 분단 체제하 한국에서 이 말은 완전히 거꾸로 적용되었다. 한 명의 반국가세력을 잡기 위해 100명의 무고한 사람을 괴롭히는 짓은 너무나 당연한 일로 여겨졌고, 평화통일, 민주화,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반국가세력’으로 몰아 투옥, 고문, 살해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진보당의 조봉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의 최백근, 민족일보의 조용수, 남조선해방전략당의 권재혁, 인민혁명당의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 등, 이들 중 대다수는 재심을 통해 무죄가 확정되었지만, 이미 억울하게 사형당한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는 법이다.


■ '공산전체주의'라 날조하는 그들


백 번을 양보해 냉전체제와 분단체제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라고 하자. 1991년 소련을 비롯해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가 전면 붕괴한 이후, 냉전체제는 끝났다. 동시에 전 세계에서 ‘공산전체주의’을 맹종하는 세력도 ‘사실상 소멸’했다. 대한민국에서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었는지도 의문이지만, 그런 사람들이 꽤 있었다 하더라도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그들은 ‘세력’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정도가 되었다. 아마도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수가 그들보다 많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 평화 통일 운동가들에 대한 ‘패륜적’ 조작 수사는 그 이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경찰과 검찰에 의해 유서대필범으로 몰렸던 강기훈, 간첩으로 몰렸던 유우성 등의 사례가 그저 ‘지난 일’인 것만은 아니다. 최근 조선일보는 검찰이 제공한 CCTV 영상을 토대로 건설 노동자 양회동씨의 분신자살과 관련해 그의 동지들에게 ‘자살 방조’ 혐의를 제기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러한 공산전체주의 세력, 그 맹종 세력, 추종 세력들에게 속거나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 현대사에서는 ‘민주·인권·진보로 위장한 공산전체주의 세력’이 많았는가, 아니면 ‘민주·인권·진보 운동가들을 공산전체주의 세력으로 날조’한 사례가 많았는가?


역대 독재정권은 ‘패륜적인 공작’으로 민주·인권·진보 운동가들을 ‘공산전체주의 세력’으로 몰아 처형함으로써 독재를 정당화하려 했다. 그 정당화 논리를 다시 꺼내 드는 것이 이 나라의 현대사를 성찰하고 더 나은 미래를 전망해야 할 ‘광복절 경축사’의 요지여야 했는가? 역사는 많은 사람이 ‘모범’이라고 생각하는 시대상황을 향해 움직이기 마련이다. 지금 윤 대통령과 그 정치적 동반자들이 바라는 미래는 전두환 시대인가, 박정희 시대인가, 이승만 시대인가, 아니면 식민지 시대인가?


우리나라 역대 독재자들의 패륜성을 성찰하지 않으면서 일본 식민지 지배의 패륜성을 비판한다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긴 하다. 그러나 광복절이었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추앙해 마지 않는 이승만조차 1957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이 우리를 독립 동등 우방으로 대하자는 생각은 꿈에도 없이 저이가 또 다시 한국을 점령해야 되겠다는 야심으로 각 방면으로 우리를 무시 모욕하고 있는 중 지금은 재무장을 대대적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동양의 약한 나라들을 모두 장악해서 저이가 패권을 잡으려고 하고 있으니...” 1957년의 일본과 지금의 일본은 얼마나 다른가? “일본은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파트너”라는 윤 대통령의 확신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 '패륜적 파시스트'정치 하는 현실


광복절 하루 전인 8월 14일, 시청 앞에서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친일매국 검찰독재 윤석열 퇴진 주권회복 시국미사’를 열었다. 그 옆에서 방해 시위를 벌인 사람들은 미사 시간 내내 고성능 스피커를 통해 “문재인 구속, 김정숙 구속, 이재명 구속, 송영길 구속, 추미애 구속, 조국 구속...” 등의 소리를 반복해서 내보냈다. 전 정권 인사들, 지금의 야당 인사들을 ‘정치적 경쟁자’가 아니라 ‘처단해야 할 반국가세력’으로 모는 행위였다. 이들의 주장과 윤 대통령의 주장이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다.


정치적 경쟁자 또는 반대자들을 ‘반국가세력’으로 모는 순간, 정치는 실종되고 패륜적 폭압만 남는다. 이것이 바로 ‘파시스트 전체주의’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자로 위장한 파시스트전체주의자’를 식별할 수 있는 안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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